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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시 (rev. 1.2)

이승한/시

1. 2008년

1.1. 5/20 안부를 묻고 싶어 지는 사람


불현듯이 보고픔에 목이 메이는 날이면
말없이 찾아가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없이 빗방울에 마음을 적시는 날이면
빗속을 걷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1.2. 5/20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1.3. 5/10 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1.4. 5/8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 이외수


온 생애를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부지기수지만
온 생애를 바쳐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우주와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사랑은 소유할 수는 없지만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1.5. 5/7 초혼 -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가지만
하늘과 땅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집 『진달래꽃』, 賣文社, 1925


1.6. 5/3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 황지우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파묻는다
나의 증거 인명을 위해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

* 나의 부끄러운 비겁함이여... 나의 멍청함이여... 두려움이여...

1.7. 5/2 冬至(동지)ㅅ달 기나진 밤을 - 황진이

冬至(동지)ㅅ달 기나진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春風(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1.8. 4/30 별이 되었으면 해 - 강문숙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너무 화려한 불빛을 지나서
너무 근엄한 얼굴을 지나서
빛나는 어둠이 배경인
네 속에 반듯하게 박혔으면 해.

텅 빈 네 휘파람 소리
푸른 저녁을 감싸는 노래
그러나 가끔씩은 울고 싶은
네 마음이었으면 해.

그리운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자주 설움 타는 네 잠
속, 너무 눈부시게는 말고
너무 꽉 차게도 말고
네 죽을 때에야 가만히 눈감는
별이 되었으면 해.


1.9. 4/29 기다리는 이에게 - 안도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산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1.10. 4/28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은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1.11. 4/19

* 부당한 권력으로 인간이 인간을 업압해서는 안된다

1.12. 4/16 수필 "인연" 중 - 피천득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1.13. 4/6일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 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1.14. 4/6 장미 - 노천명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1.15. 4/4 어떤 표정 - 박이도

한 여인에게 미소를 지었더니
"당신은 누구신데..."
다시 미소만 지었더니
"내가 누구인줄 알고..."
나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녀에게 미소를 지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1.16. 3/31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처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17. 3/26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중
내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랑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18. 3/22

그가 있어 스스로를 귀하게 여김
이런 일이 그에게도 있기를

1.19. 2월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하고는
가나 아니 가나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가려 보이지 않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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